파리코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정박사 조회 0회 작성일 2020-08-01 18:36:30 댓글 0

본문

[세만시] “역사 속 오늘, 시민의 힘을 보여줬던 파리코뮌” (이원복) 3.26(목)/ YTN 라디오

[세만시] “역사 속 오늘, 시민의 힘을 보여줬던 파리코뮌” (이원복) 3.26(목)

세계를만나는시간 NOW

방송 시간 : 평일 오전 10:10~11:00

세계를 만나는 시간 NOW_ 세계사로 뉴스읽기 x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

[세계를 만나는 시간, NOW 다시듣기] https://radio.ytn.co.kr/program/?s_mcd=0413\u0026s_hcd=97



[앵커멘트]
역사 속에서 세계를 배우는 시간이죠.
세계사로 뉴스 읽기
세만시의 역사 선생님이시죠.
덕성여대 이원복 석좌교수, 전화로 연결합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인사)

1.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다 보니까
청취자분들도.. 피로감을 좀 느끼실 것 같아서
오늘은
코로나 이슈와 좀 동떨어진 세계사를 짚어보면 좋을 것 같거든요.
1871년, 그러니까 149년 전 오늘, 어떤 세계적인 사건이 있었는지 말씀을 해주신다고요?




2.
파리코뮌이요?



3.
파리코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 살펴봐야할 것 같은데요.
당시 프랑스의 영웅으로 잘 알려진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을 맡고 있었잖아요?




4.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쥔 가운데
프러시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들었는데
청취자분들을 위해
프러시아가 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4-1.
프로이센의 지도하에
독일 통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하면서
일어난 전쟁이 바로 보불전쟁인건데...
어느 쪽이 승기를 잡았나요?




5.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외친 이후에도
프랑스 국민들은 항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투쟁을 이어갔다고!





6.
전쟁이 끝난 후
두 나라 사이에 조약이 맺어졌겠죠.




7.
프랑스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강화조약을
프랑스대혁명까지 겪어낸 시민들이
그냥 두고만 보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8.
파리코뮌은 굉장히 진보적 정책을 펼쳤다고 하던데.




9.
그런데 파리코뮌의 기세가 오래가진 못했잖아요.




10.
단명했지만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많더라고요.





===============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인사 듣고)
지금까지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였습니다.

174. 1부 [전지적 마르크스 시점] 두 유 노우 파리코뮌?

노동자가 지배한다. 짧았지만 강렬한 파리의 기억.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인 파리코뮌과 그 것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r
이제는 때가 된 줄 알았는데...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도 배워봅니다.\r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필요했는가.
노만희 : 사랑합니다.
June : 47:52 이건 진짜 용납이 안되네요... 순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설마... 했는데... 흑화하겠습니다
최동철 : 흑흑흑....  기다렸습니다 ㅠㅠ.....
Nausicaa : 여러분 본진의 찐사랑을 보여줍시다~
차차 : ♡
J L : 아직 듣지 않았지만. 제목부터 설레여.

코뮌 La Commune (Paris, 1871)

코뮌 (2000)
La Commune (Paris, 1871)

드라마, 다큐멘터리 프랑스 345 분

1870년 시작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프랑스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굴욕적인 강화조약은 파리 시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또한 전쟁 기간 중 국민군이 사용했던 대포의 압수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와 시민간의 마찰이 빚어진다. 그러나 대포를 압수하기 위해 파견된 정규군과 시민군 간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임시 정부는 마르세이유로 도피한다. 이러한 일련의 파리 꼬뮌의 성립 과정은 가상의 방송국인 마르세이유 TV와 꼬뮌 TV를 통해 각각 다른 내용으로 전달된다.

서구사회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정부였던 파리 꼬뮌의 역사적인 순간을 대부분 연기 경험이 없는 220명의 출연진을 통해 그려냈다. 출연자들은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했고, 당시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과 실업 문제와 같은 현재의 문제까지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역사의 현장에 가상의 방송국을 투입하여 현대 매스미디어의 왜곡된 보도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 제8회 전주국제영화제 -

[고종석의 파리코뮌 트위터 평]

영화 [레미제라블]이 삼천포(에 사시는 분들껜 죄송)로 빠져, 타임라인에 1871년 파리코뮌에 대한 얘기가 무성하다. 파리코뮌에 대한 간단한 결산: 시민군(파리군)이 처형한 반혁명분자는 약 500 명. 시가지전투 중 정부군(베르사유군) 사망자는 약 900 명. 시가지 전투와 그 이후의 보복(글자 그대로의 보복이었음. 재판 없이 총살된 노동자만 약 3,500 명) 과정에서 살해된 파리 시민 수는 자료에 따라 천양지차.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까지. 특히 노동자의 대학살이 저지러짐. 파리의 제화공, 연관공, 너새공, 페인트공의 반이 학살됨. 베르사유군의 파리 점령(파리코뮌 붕괴) 뒤 파리는 자치권을 잃고 정부의 직접관할지가 돼 1977년까지 시장이 없었음. 그 첫 시장이 전 대통령 자크 시라크. 1876년까지 파리는 계엄령. 신문과 연극은 사전검열. 카페와 레스토랑 심야 영업 금지.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까지 파리코뮌에 대한 공적 찬양이 금지되고, 파리 사람들은 위험스러운 무정부주의자들로 여겨져 지방 사람들로부터 왕따당함. 파리코뮌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국내에서 허용된 건 제1차세계대전 이후. 위대한 제3공화국도 거의 반세기 가까이 파리코뮌에 극히 적대적이었다는 뜻. 파리코뮌에 대한 당대의 극히 긍정적인 평가를 접하고 싶은 분은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을 읽으시라.
22 - Reekie : 러닝타임 5 시간
litterature histoire philosophie : 5:13:50
평초 : 5시간 짜리를 번역한분 참 대단...
BLACK DRAGON & ANGRY CAT :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자 인간사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
aglio : 근데 궁금한게 있는데요 왜 앞에 la가 붙나요? les나 le도 아니고 la가 붙는 이유가 뭔가요?
이준석 : 현장감이 좋네요

... 

#파리코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934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Copyright © www.santorinips.kr.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help@oxmail.xyz